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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부하는 Hyun
역사 이야기

삼국시대(3) - 신라의 문화

by 공부하는 Hyun 2023.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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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흔히 성골부터 6두품까지 관료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겠지만 그것은 신분제인 골품제이고 관등은 17관등의 관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고구려, 백제와 마찬가지로 귀족들의 회의인 화백회의로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였다. 화백회의는 진골 출신인 대등들로 구성되고 수상격인 상대등을 의장으로 하며, 만장일치로 결정하는 전통이 있었다. 통일 이전 신라의 지방제도는 주 - 군 - 청으로 이루어졌고 각 주마다 군주가 파견되었다. 이러한 신라의 주는 군사조직과 연결되어 6주에 편성된 부대를 6정이라고 하며, 진골 출신의 장군이 지휘하였다.

  신라의 골품제는 혈통에 등급을 두어 정치적으로나 일상생활에서에 차별을 두는 제도였다. 최고위 귀족은 오로지 왕족의 피만 있는 성골과 그 다음 왕족의 피가 섞인 진골, 그 아래로는 6두품, 5두품, 4두품 등 하위 신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진골은 17관등중 최고관등인 이벌찬까지 승진할 수 있었지만, 6두품은 아찬, 5두품은 대나마, 4두품은 대사까지만 승진 할 수 있는 차별적인 신분제도였다. 이외에도 가옥의 크기나 의복의 색, 수레와 말의 숫자 등까지 구분하여 사용하도록 하였다. 지방에는 양인들이 있었고, 최하층에는 역시나 노비가 있었다.

 6세기인 진흥왕 대에 이르러서야 역사서인 <<국사>>가 편찬되었고, 삼국통일 이후에는 유학교육 기관인 국학이 설립되었다. 불교 또한 삼국 중  가장 늦게 받아들였는데 5세기 초 고구려에서 온 승려인 묵호자가 민간에 불교를 전파했으며, 이후 양나라 승려 원표가 신라 왕실에 불교를 전파하였다. 국교로 인정받은 것은 법흥왕 14년 이차돈이 순교하면서부터다. 삼국 중 가장 늦게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왕이 곧 부처라는 사상을 퍼뜨려 불국토 사상 또한 퍼지게 되었다. 이러한 불국토 사상 덕분에 신라 전국토에 사찰을 세우게 되어 현재 신라의 사찰과 흔적을 많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경주의 황룡사를 보면 9층 목탑은 현재 초석만 남아 있지만 그 외의 건물들을 봐도 건축에도 조예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첨성대를 보면 천문학에도 관심이 있었다고 추측된다.

 

 마지막으로 신라의 무덤은 나무로 곽을 짜고 그 위에 돌을 쌓은 후 흙으로 덮는 돌무지덧널무덤 형식을 많이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무덤에서 금관 외에도 옥과 유리제품 등이 발굴되었는데 유리제품이 나온 것을 보아 서역과의 교류도 있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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