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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부하는 Hyun
역사 이야기

삼국시대(1) - 삼국의 성립과 발전

by 공부하는 Hyun 2023.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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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적으로 삼국시대라고 하면 고구려와 신라, 백제 3개의 고대국가가 형성된 시기로 제대로 된 철기문화가 형성된 시기라고 본다. 가야를 포함해 사국시대가 아닌 가야를 뺀 삼국시대라고 불리는 이유는 고대국가라고 보는 것보다는 연맹국가적인 성격을 띠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삼국시대라고 부른다.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고구려는 기원전 1세기에 주몽에 의해 왕국으로 발전하였다고 본다. 초기에는 소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의 5 부족이 연합한 상태에서 계루부가 정국을 주도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AD 3년에 수도를 졸본에서 압록강 연안의 국내성으로 옮겼다. 이러한 천도의 이유는 압록강이 가까워 나가기 용이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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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압록강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을 병합하는 데 힘을 썼다. 6대 왕 태조왕은 동쪽의 옥저를 복속시켰고, 9대 왕 고국천왕대에 이르러서는 왕권이 강화되고 중앙집권화가 되었다. 5부는 이때에 이르러서 동, 서, 남, 북, 중의 방위면 5부로 개편되었으며, 과거 5부의 족장들은 중앙귀족으로 편입되었다. 이때 고국천왕은 을파소를 국상으로 등용하여 왕권 강화 정책을 추진하였고, 이때 시행된 대표적인 정책이 토지가 없는 농민들을 보호해 국가의 조세를 부담하는 공민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인 진대법이다. 이후 15대 왕 미천왕 대에 이르러서는 낙랑군을 축출하고 대동강 유역을 차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바로 다음 왕인 고국원왕 대에는 서쪽으로는 선비족의 침입, 남쪽으로는 백제의 침입으로 힘든 상황에서 고국원왕이 백제와의 전쟁에서 전사하여 국가적 위기상황을 맞았다. 이후 소수림왕은 즉위를 하자마자 국가체제에 정비에 주력하였고, 불교 수용, 태학 설립, 율령 반포 등 다방면에 걸친 체제 안정화 정책을 실시하였다.

 시간이 지나 19대 왕 광개토대왕은 대규모 정복 사업을 시작하였고, 고구려의 오랜 염원이던 요동진출을 이루었다. 남쪽으로는 백제에게 항복을 받았으며, 왜의 침입을 받은 신라를 도와주는 등 세력이 강대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독자적인 연호인 '영락'과 자신을 '태왕'이라 칭하는 등 강대한 국력과 자신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뒤를 이은 장수왕은 부왕의 정복사업을 계승하여 고구려 최고의 전성기를 이룩했다. 평양으로 천도하여 남진정책을 하였고, 신라와 백제의 연합을 상대로 이겨 백제의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붙잡아 죽였다. 이 때는 한강유역을 가지고 있을 때를 국가의 전성기라고 판단하여, 광개토대왕대가 아닌 장수왕 대를 고구려의 전성기라고 기록한다.

 

백제의 성립과 발전

 백제의 건국신화에 따르면 B.C 18년 주몽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 형제가 마한으로 내려와 형인 비류는 미추홀에 자리잡고 동생 온조는 위례성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이후 온조가 비류 세력을 흡수하였고 국호를 백제로 바꾸었다고 한다. 백제의 첫 도읍지인 위례성은 서울의 풍납토성, 몽촌토성이 백제의 도성이라고 추정된다.

 건국 초기에는 마한에 속한 소국 중 하나로 출발하여 초기에는 마한에 조공을 마쳤지만 마한의 다른 소국들을 정복해 나가면서 발전했다. 또한, 한강유역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국력을 키워나갔다.

 3세기 중엽 고이왕 대에는 서북지방의 낙랑세력과 동북 지방의 말갈족에 대비하면서 고대 국가로서의 체계를 정비하였다. 좌평제와 16관등제를 시행하고 지방 유력자들을 중앙통치체제에 편입시켜 혈연중심 사회에서 왕 중심 사회로 중앙집권체제를 마련하였다. 이때 정비된 국가체제를 기반으로 근초고왕 대에는 정복활동을 하였다. 남쪽으로는 마한을 쳐 전남 지역까지 확장하였고, 북쪽으로는 평양성까지 나가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이렇듯 4세기 초에 전성기를 맞이했던 백제는 5세기에 고구려 장수왕 때에 이르러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전사하는 등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웅진으로 천도를 해 22담로를 설치하였고, 6세기에는 사비로 천도하고 남부여로 국호를 바꾸었다. 이 때는 22부의 중앙부서가 정비되고 수도는 5부, 지방은 5방 체제로 개편되었다. 이후 신라 진흥왕과 동맹을 맺어 한강유역을 회복하였으나 신라가 배신하여 땅을 빼앗겼다.

 

신라의 성립과 발전

 신라의 왕호는 1대 거서간, 2대 차차웅, 3대 이사금이라는 칭호가 오래 사용되다가 17대 내물마립간 때부터는 마립간이라는 칭호가 사용되었다. 22대 지증왕 때부터 왕이라는 칭호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내물마립간 때부터 박, 석, 김 세 성씨가 교대로 왕위를 계승하던 것이 끝나고 김 씨가 독점적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와 비슷한 수준으로 올라가게 된 건 6세기 이후이다. 6세기초 지증왕 때에 소를 이용해 밭갈이를 하면서 농업생산력이 증대하였고, 국호도 신라로 확정하였으며, 왕호를 마립간에서 왕으라 칭하며 우산국을 복속시켜 영토로 편입했다.

 이후 법흥왕 대에는 병부를 설치하여 왕이 군권을 장악하였고, 상대등을 설치하여 재상과 같은 지위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율령을 공포하고 건원이라는 연호를 세웠으며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받아들이는 등 왕권 강화에 더불어 신라의 문화적인 기틀을 마련했다고 본다.

 진흥왕 대에 들어서는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만들고, 대가야를 정복해 낙동강 서쪽을 차지하였고,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던 한강 유역 또한 차지함으로써 신라의 전성기를 열었다. 이후 함경도까지 진출하여 영토를 넓혔는데 이러한 사실은 진흥왕 순수비를 통해 기록되어 있어서 단양 적성비, 북한산비 등을 확인하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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