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공부하는 Hyun
역사 이야기

한반도 초기국가의 형성에 대하여 - 고조선과 부여

by 공부하는 Hyun 2023. 1. 9.
반응형

2023.01.07 - [역사 이야기] - 선사시대의 문화(3) - 청동기

 

선사시대의 문화(3) - 청동기

2023.01.06 - [역사 이야기] - 선사시대의 문화(1) - 구석기 선사시대의 문화(1) - 구석기 선사시대라 함은 보통 구석기 시대부터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까지의 시기를 뜻한다. 인류가 나타난 시점

hyeon00.tistory.com

고조선

 고조선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국가이다. 건국 신화를 보면 옛날 환인의 아들 환웅은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환인이 이를 알고 천부인 3개를 주면서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무리 3천과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곡식, 인명, 질병, 형벌, 선악 등을 주관하면서 인간 세상을 교화시켜 나갔다. 이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항상 환웅에게 사람이 되기를 빌자 쑥과 마늘을 100일 간 먹으면서 이것을 지키면 사람의 모습이 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이것을 호랑이는 어겼지만 곰은 지켜 여자의 몸을 얻었고, 환웅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 아들이 바로 '단군왕검'으로 단군은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 되던 해에 평양성으로 도읍(수도)을 옮기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명하였다. 이후 아사달로 천도 후 1,500년 간 나라를 다스리다가 기자가 조선에 봉해지자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반응형

 

 이것을 우리는 '단군신화'라고 한다. 신화는 신비한 이야기 혹은 신성한 이야기라는 뜻으로 기록의 100%를 사실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하지만 100% 사실이 아니라고 해서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환웅의 아들이 단군왕검이라는 점에서 신성한 피가 흐른다는 것을 뜻하고, 곰이 사람이 되었다는 점에서 당시 곰을 토템으로 숭배했던 것 같다고 추측할 수 있다. 또, 곡식의 문제를 주관했다는 내용을 통해 농경 사회에 접어든 점, 곰, 호랑이의 등장 중 곰이 사람이 됨으로써 호랑이 부족은 주축 세력에서 밀려나고 곰 세력이 주축 세력이 되었다는 점, 환웅이 군림하는 것을 통해 계급사회가 시작되었다는 점 등 많은 부분을 추측할 수 있다.

 

 고조선은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형성된 국가로, 비파형 동검과 거친 무늬거울, 고인돌이 대표적인 유물이다. 이후 날카로운 세형동검, 잔무늬거울, 돌널무덤, 토광묘 등이 나타나 철기문화가 발달하였다. 이 같은 문화는 중국계 청동기 문화와 현재의 대릉하~요하지대를 경계로 지역적으로 구별할 수 있어 고조선의 세력범위는 요동반도와 중국 동북지방 및 한반도에 걸친다고 본다.

 

 한편 <<한서>>에 따르면 고조선에는 범금 8조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는데, 고조선의 8가지 법률이다. 이 중 3가지가 전해지고 있는데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상해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배상하며, 도둑질한 사람은 그 집의 노비로 삼고 만약 죄를 씻고자 할 때에는 50만 전을 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당시 고조선은 사유 재산이 있었고, 노동력을 중시하였으며, 형벌과 노비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부여

 부여는 기원전 3~2세기 경 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초기국가이다. 부여에 관한 기록은 <<삼국지>> 동이전, <<삼국유사>>, <<삼국사기>>등 다양한 책에 기록되어 있고, 이러한 책에는 북부여, 동부여, 남부여 등 방위명 또한 기록되어 있다.

 부여의 건국설화는 동명설화로 부여의 시조 동명은 탁리국 왕의 시비가 하늘에서 내려온 기운에 의해 임신해 태어났는데, 탁리국왕은 이를 버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동명은 돼지와 말이 보호해 주어 목숨을 보전하였고 활을 잘 쏘는 것으로 이름을 알렸다. 왕이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 동명을 죽이려 하자 동명은 남쪽으로 도망하였고 물고기와 자라의 도움으로 엄호수를 건너 남하하여 부여를 건국하였다고 한다. 주몽설화와 비슷하여 동명설화가 주몽설화의 배경이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부여는 남쪽에 고구려, 동쪽에 읍루, 서쪽에 선비와 접하고 있었고, 이들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 긴밀한 교류를 하였다. 중국도 부여를 비교적 우호적으로 대우하였다고 한다. 부여는 고구려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는데, 초기에는 늦게 건국된 고구려보다 우위를 점하였지만 3세기 후반 선비족의 침입으로 국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결국엔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부여는 국왕을 중심으로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대가 등이 모여 국가정책을 논의하였고, 대가들은 사출도라고 불린 독자 영역을 주관하였으며,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 '제가'가 직접 무장하고 전쟁에 참여하였다.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되면 왕에게 책임을 돌린 점을 보아, 대가들의 영향력이 컸다고 생각한다.

 부여의 법률은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하고, 그 집안사람들을 노비로 받아들였다. 도둑질을 하면 훔친 물건의 12배를 변상하게 하였고, 남년 간에 음란한 짓을 하거나 여자가 투기를 하면 모두 죽였다. 여기서 투기란 부부 사이나 사랑하는 이성사이에서 상대되는 이성이 다른 이성을 좋아할 경우에 지나치게 시기하여 자기의 이득을 위해 하는 행위를 뜻한다.

 12월에는 영고라는 제천행사를 지냈는데, 이때 사람들은 날마다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며 즐겼으며 죄수들을 풀어주기도 했다. 전쟁 중에도 제사는 지냈으며 소를 잡아서 발굽을 보아 점을 쳤는데 발굽이 갈라지면 흉하고 발굽이 붙으면 길하다고 생각하였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