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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부하는 Hyun
역사 이야기

삼국시대(2) - 고구려, 백제의 문화

by 공부하는 Hyun 2023.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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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11 - [역사 이야기] - 삼국시대(1) - 삼국의 성립과 발전

고구려 사회와 문화

 고구려는 기본적으로 국왕을 중심으로 형성된 귀족관료제에 의해 운영되었는데, 국왕 바로 아래에 관료제의 우두머리인 국상이 있었다. 그 아래로는 14등급에 달하는 여러 관료들이 있었고, 고구려에서 국가의 중대사에 대한 결정을 할 때에는 귀족들의 회의를 통해 이루어졌다. 1 관등인 '대대로'를 임명할 때에는 귀족들인 가(加)들이 모여 선출하였으며, 5 관등 이상의 귀족들이 주요 국사를 처리하였다. 고구려의 지방제도는 가장 큰 단위로 5부를 두고 그 아래 군현을 두었는데 이것은 중국식 군현과 비슷하며, 이 부에 파견된 지방장관을 욕살이라 불렀다.

 삼국시대는 신분제가 엄격하게 지켜진 사회로 고구려는 왕족은 고추가로 칭해지기도 하였다. 다음은 대가(大加)로 불리는 귀족집단인데 특권적 지위를 차지하였고, 그 아래 귀족신분의 하층을 구성하는 소가(小加) 집단이 존재했다. 지방에서는 철기의 발달로 인하여 소규모 토지를 경작하는 자영농들이 넓게 퍼졌고 이들은 양인들로 조세, 공납, 군역 등의 역을 지어야 했다. 조세와 공납을 받을 때는 장정의 머릿수를 기준으로 인두세를 부과하였고, 평민 아래에는 용민이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노비가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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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는 중국과 가까워 한문을 같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5세기 초에 세워진 광개토대왕릉비를 보면 이러한 추측을 할 수 있다. 한자를 사용하면서 중국의 유교, 불교, 도교 등의 경전 또한 자연스럽게 유입되었을 것이다. 소수림왕 2년에는 태학이라는 학교를 세워 유교를 가르쳤으며 후에는 지방에도 경당이라는 학교를 세워 청소년들에게 유교와 무예를 가르쳤다. 또 소수림왕은 전진의 승려 순도를 통해 불교도 받아들였을 정도로 다양한 문화 발전의 기틀을 마련해 준 왕이라고 볼 수 있다.

 고구려의 건축물 중 가장 많이 남아있는 것은 고분인데, 고구려의 무덤은 현재 길림성 집안시와 평양 부근에 많이 남아 있따. 처음에는 돌무지무덤 형식이었고 후기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굴식돌방무덤으로 변화하였다고 추측한다. 돌무지무덤은 석재를 쌓아 올려 만든 것으로 현재 중국 집안시 일대에는 1만 2천 여기의 무덤이 남아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장군총으로 바닥의 한 면이 31.5미터, 높이가 12,4미터로 피라미드 형태를 띠고 있다.

 굴식돌방무덤은 돌을 사용해 널방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어서 봉분을 만든 무덤을 말한다. 이러한 무덤의 널방에는 벽과 천장에 벽화가 그려진 것이 많은데 사신도, 신선도, 무용도, 씨름도, 수렵도, 생활풍속도 등 종류가 다양해서 당시 고구려의 문화를 분석하기에 중요한 자료라고 볼 수 있다.

 

 백제의 사회와 문화

 - 백제 역시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관료제를 정비하였는데 수상격으로는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내신좌평, 재정을 담담하는 내두좌평, 예식을 담당하는 내법좌평, 숙위를 담당하는 위사좌평, 사법을 담당하는 조정좌평, 군사를 담당하는 병관좌평 등 업무별로 6명의 좌평이 존재했던 것이 특징이다. 궁정관사를 포함한 근시관사로 구성된 내관 12부, 일반 국정을 담당한 외관 10부를 합하여 총 22개의 관부가 있어 세부적으로 나눈 만큼 관료제에 대한 정비가 잘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관등제는 총 16 관등으로 최고위 관원은 자주색, 중간은 붉은색, 하위는 푸른색 관복을 착용하여 관복의 색으로도 관등을 구분할 수 있었다. 국가 중대사를 논의했던 회의는 '정사암회의'로 정사암이라고 불리는 넓은 바위에 둘러앉아 귀족들이 회의를 하고, 수상을 뽑는 투표를 행하는 것을 말한다.

 백제의 신분제는 기본적으로 왕과 귀족, 양인, 노비로 이루어져 있었다. 또, 8개 성의 대귀족들이 있었고, 이들과 더불어 왕족인 부여씨가 고위관직의 대부분을 독점했다. 

 제도로는 박사제도가 있었고, 왕인, 아직기 등은 일본에 유교 경전을 전해주고 일본 태자의 스승이 되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는 점을 미루어 보아, 백제의 학문수준이 예로부터 매우 높았다고 생각된다.

 백제에서 처음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침류왕 때로 중국 동진의 승려 마라난타를 통해 불교를 받아들였다. 이러한 백제의 불교는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 지배계층에게 환영받았으며, 엄격한 계율을 강조하는 계율종이 성행하였다. 6세기 초 성왕 때는 인도에 가서 경전을 가지고 돌아온 겸익으로 인해 계율종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백제 말기에는 호국적 성격을 띠게 되며, 무왕이 사비성 부근에 세운 왕흥사나 익산의 미륵사 등이 이러한 호국 불교를 상징하는 사찰이었다.

 백제의 무덤양식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돌무지무덤의 양식으로 무덤을 축조했다. 웅진 천도 이후에는 굴식돌방무덤이 유행하였으며 벽돌무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벽돌무덤은 무령왕릉으로 중국 양나라의 영향을 받아 내부가 벽돌로 화려하게 축조되었다. 또한 왜에서 가져온 소나무로 관을 만들어 당시 백제가 고구려, 양, 왜 등 다양한 국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 금동대향로 복제품

 또한 마애삼존불, 금동대향로, 산수무늬벽돌 등 다양한 문양 조각과 금속공예를 보여주는 문화재들이 있어 예술이 많이 발전했을 시대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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