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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부하는 Hyun
역사 이야기

한국사 - 남북국시대 발해

by 공부하는 Hyun 2024.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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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6 - [역사 이야기] - 한국사 - 남북국시대 신라의 삼국통일

 

 

한국사 - 남북국시대 신라의 삼국통일

660년에 나당연합은 백제의 옛 땅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였고, 663년에는 신라를 계림주대도독부로 삼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668년에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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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 얘기를 하기 전에 예전과 달리 통일신라와 발해를 구분해서 부르지 않고 합쳐서 부르는 이유는 발해 또한 우리의 역사이기에 요즘은 남북국시대라고 칭한다.

 발해는 고구려 멸망 30년 후인 698년에 대조영이 건국하였다. 마지막 왕 대인선까지 15대에 달하는 왕이 재위하였고, 영토가 가장 넓었을 때는 고구려 영토의 1.5배나 되었다고 전해진다.

 

발해사

 - 발해는 대조영 사후 무왕 대무예가 흑수말갈을 제외한 나머지 말갈 세력들을 복속시켜 영토를 넓혔다. 이러한 영토확장을 두려워한 흑수말갈이 당과 동맹을 하려 하였고, 발해는 당과 신라와 국경을 맞대고 계속해서 전쟁을 치렀을 것이다.

 무왕이 죽은 후에는 문왕인 대흠무가 즉위하였는데, 대내적 통치체제 정비에 주력하여 중경에서 상경으로 천도해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을뿐더러, 동북방면으로 말갈부락을 복속시키고 부여부, 철리부, 솔빈부, 정리부, 장령부 등 여러 부를 설치해 국력 강화에 힘썼다.

 그 후 여러 왕이 즉위했지만 발해 귀족들의 권력싸움에 휘말려 오래 통치하지 못하였고, 10대 선왕인 대인수가 즉위하면서 왕권이 안정되었다. 이 때 발해는 말갈부락을 복속시키고, 요동지역을 흡수하는 등 활발한 대외정복 활동으로 강대해졌고, 이 때 비로소 해동성국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발해의 통치체제

 - 발해의 중앙통치체제는 당의 제도를 모방하여 3성(정당성, 선조성, 중대성) 6부 1대 7시 1원 1감 1국으로 조직되었다. 지방통치체제 또한 당의 영향을 받았고, 수도였던 상경 용천부는 장안성을 본떠 조방제(동서와 남북으로 큰 도로를 배치하고 바둑판의 눈금처럼 작은 구획을 나누던 도시 정비 제도.)를 실시하였다. 또한, 상경, 중경, 동경, 남경, 서경 등 5경과 더불어 15부 62주가 편제되어 있었고, 그 외에 영주, 동주, 속주라는 3개의 독주주(중앙의 직속된 주)가 있었고, 주 아래 현을 설치하였다. 지방관으로는 발해의 지배층인 고구려인이 주로 임명되었으며, 자연부락은 수령이 관장하였다. 군사제도르는 8위가 운영되었다.

 

발해의 멸망

 - 발해는 내부적인 권력 문제로 쇠퇴하다가 거란의 태조 야율아보기가 거란족을 통일한 후 서방 세력 정벌을 마친 뒤 발해 원정을 시도하였다. 거란족이 발해의 수도인 상경 용천부의 홀한성을 포위하자 발해의 마지막 국왕인 대인선이 300여 명의 귀족 관료들과 함께 항복함으로써 230년 가까이 지속된 발해라는 국가가 멸망하였다. 그 후 발해의 귀족들은 고려로 망명하였고, 유민들이 부흥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지만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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