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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부하는 Hyun
역사 이야기

[남북국시대 대외관계/역사]

by 공부하는 Hyun 2024.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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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의 대외관계

 통일신라 대에는 당, 일본, 발해, 서역 등 다양한 세력들과 활발하게 교류했습니다. 그중에서도 통일신라 이전 신라와 가장 밀접한 관계였던 국가는 나당연합을 했던 당나라였습니다. 신라와 당이 교류를 하다가 군사동맹을 맺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서로 한반도를 갖기 위해 나당전쟁 전까지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나당전쟁이 신라의 승리로 끝난 후, 문무왕과 당 고종이 사망하자 불화는 점차 사그라들었습니다. 신라는 통일 후에도 당과도 전쟁을 하면서 전후복구 및 국가 체제의 정비가 필요했기에 당과 관계를 개선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당 또한 중국 여사상 최초로 여인으로써 황제가 된 측천무후가 정통성을 확보하고 권력 안정을 위해 주변국들과 관계 개선을 적극적으로 해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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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어느 정도는 어색한 관계가 있었기에 시간이 지나고 성덕왕 즉위 이후에 무려 46회나 사신단을 당에 파견해 당과의 교섭을 꾸준히 하여 나당관계가 완전히 개선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당의 요청으로 발해에 정벌군을 파견하였고, 그 대가로 당으로부터 패강 이남의 땅을 신라의 영토로 인정받았습니다. 더하여 사신단뿐만 아니라 유학생, 구법승 등 다양한 인물들의 왕래로 당의 문물을 수용하였고, 당에게 조공을 해 활발한 활동이 있었습니다.

 

 9세기 이후에는 신라의 왕위쟁탈전과 안사의 난, 황소의 난 등으로 사회적 혼란기에 빠져 서로간의 사신단 파견보다는 구법승, 유학생, 상인들 등 백성들간의 교류가 활발해졌습니다. 신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교와 유교의 공부를 위해 당으로 유학도 많이 떠났습니다. 이같은 교류로 인해 산둥반도 연안가 장강 하류에 신라인들이 거주하는 공간인 신라방, 신라촌을 비롯해 관청인 신라소, 여관인 신라관, 사찰인 신라원이 만들어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장보고가 완도에 군사기지이자 무역기지인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적을 소탕하고 해상권을 장악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완도가 신라와 당·일본을 잇는 해상교통의 요지였어서 청해진이 국제 무역의 중계지로 커다란 번영을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일본 역시도 통일신라의 대외관계에 중요했는데, 나당전쟁을 치루는 동안 당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과 사신을 주고받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이 당을 견제하기 위해서 당과의 관계 회복전까지 관계를 유지했고, 당과의 관계 개선 이후 일본과의 관계에 소홀했다가 후에 장보고와 상인들에 의해 다시 교류가 진행되었습니다. 당과의 관계 개선 이전 일본과의 관계는 신라 사절로부터 물건을 사기 위해 일본인들이 매입 예정 품목과 가격을 정부에 제출한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일본 왕실의 보물창고 동대사 정창원에서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라는 문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경주 괘릉 무인석상

  이외에도 경주 괘릉의 무인상이나 경주 용강동 고분 출토 서역인 추정 토용 등을 보았을 때 서역인들이 거주했을 수도 있었다고 추측된다.

 

발해의 대외관계

 

 발해 역시 당과 일본, 신라 등 주변 왕조들과 활발히 교섭하였습니다. 발해가 당에 100여 회 가량 사신을 파견했고, 당은 발해에 30여 회 가량 사신을 파견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발해도 신라처럼 조공무역을 하였는데 주로 수출했던 품목은 말, 비단, 담비가죽, 명주, 구리 등으로 보입니다.

 일본과도 처음에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교류를 하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경제적인 이익을 위한 성격을 많이 띄었습니다. 경제적 교류를 할 때에는 당과의 교류도 활발해지고 신라와의 관계 또한 호의적이진 않더라도 적대적인 면은 많이 사라졌기에 일본과의 교류에서 경제적인 이익을 취하려고 하였습니다.

 

 신라와는 국경을 맞대고 있다 보니 우호적인 스탠스보다는 적대적이었던 적이 많았습니다. 발해 건국 초에는 국가의 성장이 워낙 빠르다 보니 당나라가 이이제이 정책으로 신라를 이용해 발해를 공격하도록 종용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해동성국이라 불릴 정도로 강대했던 국가였던 발해였기에 별다른 타격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9세기부터는 신라의 국력이 약화되고 발해의 국력이 강성해져 서로 당과의 관계를 두고 갈등이 생겼고, 발해 사신이 당 조정에서 신라 사신보다 상석에 앉게 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당으로부터 거절당한 사례도 있다고 합니다.

 

 적대적인 교류가 많았지만 우호적으로 교류를 했던 적도 있는데 신라에서 대조영에게 신라의 제5등 관등인 대아찬을 하사하기도 하였고, 「 신당서 」, 「 발해전 」 에 따르면 발해의 주요 대외 교통로 중 하나에는 신라도가 존재했다고 하며, 「 고금군국지 」에서는 발해의 책성부와 신라의 천정군 사이에 39개의 역이 설치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기록들을 보아 남북국 양국이 서로 적대관계로 많이 싸우기도 하였지만 상호 교류도 충분히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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