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18 - [역사 이야기] - [남북국시대 대외관계/역사]
고려의 성립
신라말 혼란으로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건국되면서 후삼국시대가 전개되었지만 길지 않은 시기기에 넘어가고 고려의 성립으로 바로 넘어가겠습니다. 고려는 918년에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건국하였습니다. 왕건은 송악(지금의 개성)을 수도로 삼고, 935년에는 신라를 병합, 936년에 후백제를 정복하면서 후삼국을 통일하였습니다. 이 때의 후삼국 통일은 호족과 연합을 해 가능했던 것으로 통일 후 호족으로부터 왕권을 지키기 위해 호족출신 여인들과 혼인하여 6명의 왕후와 23명의 부인을 두었다고 합니다. 또한, 호족을 관리로 등용해 왕씨 성을 내리는 사성정책을 펼쳤으며, 향촌 지배권도 부분적으로는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 후에는 호족의 힘이 너무 강성해질까 걱정돼 기인 제도와 사심관 제도를 활용해 호족을 견제하고 지방 통치를 보완하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서 기인 제도는 지방 호족의 자제를 볼모로 중앙에 머물게 하는 제도로 호족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 강화를 위해 실시한 제도입니다. 통일신라의 상수리 제도, 조선의 경저리 등도 같은 목적으로 시행되기도 하였습니다. 사심관 제도 또한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제도로 그 지방의 관리를 그 지방 사람으로 임명하여 지방에서 반역의 일이 발생하면 사심관 직에 임명된 관리에게 연대 책임을 지게 함으로써 지방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제도입니다. 조선 세종 때 실시한 토관 제도도 이와 비슷한 성격의 제도입니다.
그 외에도 「정계(政誡)」 와 「계백료서(誡百寮書)」를 지어 관리들이 준수해야 할 규범을 만들고 후대의 왕들에게도 왕이 지켜야 할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후에는 독자적인 세력 기반 형성, 변경지 개발, 옛 고구려 땅을 되찾기 위한 북진정책을 추진하기도 하엿습니다. 더불어 백성들의 민심을 사로잡기 위해 조세를 감면해 주기도 하였고, 호족에게도 과도한 수취는 금지하게도 하고, 발해 유민들도 수용하였습니다.
태조 왕건 이후에 혜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건이 호족과 결혼하여 많은 아이를 낳아 왕권다툼이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혜종을 끌어내리고 광주원군을 왕으로 삼으려는 왕규의 난이 일어나기도 하여 정종이 왕이 된 후 호족세력의 힘을 약화시키고 왕권강화를 하기 위해 풍수지리설을 바탕으로 서경 천도를 시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정종이 서거하기 전에 광종에게 왕권을 넘기자 광종은 노비 중 양인을 찾아서 해방시키는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시행하여 호족출신 공신들의 노비를 제거하였고,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 제도를 시행하여 왕권의 안정을 꾀했습니다. 정종 때부터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던 것이 광종 때에 이르러서야 빛을 본 것이죠. 광종은 이외에도 위계질서의 확립을 위해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고, 칭제건원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서 칭제건원이란 왕 대신 황제라 칭하고 새로운 연호를 쓰는 것을 뜻합니다. 광종의 경우 광덕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후에 성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성종은 신라 시대 6두품 유학자인 최승로를 중용하였습니다. 최승로는 시무 28조를 작성해 유교정치이념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귀족정치의 실현을 주장하였고, 성종은 이를 국가정책에 반영해 중앙에는 중서문하성과 중추원 등 통치기구가 설립되었고, 관제도 질서를 잡아 지방 12곳에 외관을 파견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였으며, 지방 향리의 직제 또한 마련하는 등 중앙지배체제를 정립하는 데 힘썼습니다.
성종 사후에는 경종의 아들인 목종이 즉위하였는데,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자신들의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고 해 목종은 제대로 된 정치를 하지 못하고 현종을 후계로 삼고 강조에게 지키도록 하였는데, 강조는 개경으로 들어와 김치양 일파를 제거하고 목종 또한 폐위한 후 살해한 강조의 정변을 일으켰습니다. 이 때 왕위에 오른 현종이 지금 고려거란전쟁에 나오는 현종입니다. 드라마에서도 봤듯이 거란의 침입 때문에 제대로 된 제도나 법 등을 많이 정비하지는 못하였지만 군현제의 골격을 마련하고, 향리의 공복을 정하기도 하였습니다.
현종 다음으로는 문종 때가 고려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음이 있는 관료를 대우하기 위한 토지 봉급제인 양반공음전시법을 제정하고, 전시과를 개정하는 등 토지제도를 정비하였으며 향리의 승진규정도 마련하였습니다. 그 다음 여러 왕이 있었지만 헌종 때는 왕위계승을 둘러싼 반란인 이자의의 난이 있었고, 숙종은 남경(한양) 건설, 동전 유통, 여진 정벌로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하였고, 예종이 별무반을 창설하여 여진 정벌을 성공시킴으로써 왕권강화에 힘썼습니다.
예종의 뒤는 예종과 이자겸의 딸 사이의 아들인 인종이었는데, 인종이 즉위하자 이자겸은 왕의 외조부로써 막강한 권력을 누려 인종이 이자겸을 제거하려 하였지만, 역으로 이자겸이 척준경과 손을 잡아 이자겸의 난을 일으켜 왕위에 오르려고 하였고, 금방 진압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지배층의 분열이 심화되었고, 외부적으로는 금나라가 등장해 고려에 압력을 가하자 묘청과 정지상을 중심으로 서경(평양)천도, 금국정벌 등을 주장하는 세력과 김부식을 필두로 한 친금 정책을 주장하는 세력들과의 알력싸움이 있었습니다.
인종은 서경천도에 관심은 있었으나 개경의 문벌귀족들로 인해 서경천도가 일어나지 않자 묘청은 서경에서 나라 이름을 대위, 연호를 천개로 짓고, 묘청의 난을 일으켰고, 묘청을 필두로 한 반란은 김부식을 비롯한 토벌군들이 진압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왕권이 약해지고 문신세력들의 권력이 강해졌지만 문벌귀족 사회의 갈등이 해결되지 못한 채 의종이 즉위하게 되었고, 결국 의종 후기에는 무신들에 의한 정변인 무신정변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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